Article

개인적인 체험 - 오에 겐자부로

個人的な體驗 (1964년)

개인적인 체험 표지|150

Notes

사건과 감정 사이에는 대개 논리적인 인과 패턴이 있다. 슬픔에 울고 기쁨에 웃는, 지극히 1차원적인 방식으로. 우리는 이렇게 학습된 감정 표현에 익숙하고, 그것이 정해주는 방향을 따라 감정을 드러낸다. 그런데 가끔, 특정한 사건에 대한 나의 감정과 그 표현이 이 일반적인 패턴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느낄 때가 있다. 부러 납득할 만한 설명을 찾아내기도 하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내가 이상한 상태라고 결론 내릴 때도 있다.

제목처럼, 뇌가 밖으로 나온 아이(결과적으로는 혹이었지만)를 통해 버드가 겪는 감정들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제목 때문에 더더욱 의식적으로, 작가의 묘사와 문장을 ’개인적’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 읽게 된다. 초반에는 늘어지는 비유와 긴 문장의 호흡에 짜증이 좀 났다. 일본 소설을 찾는 이유 중 하나가 절제된 문장에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버드의 감정 묘사는 놀랍도록 치밀하고 섬세하다. 그 표현들에 감탄하다 보니 어느새 책장은 휙휙 넘어갔다.

인상적인 부분은 버드가 자기기만에 빠져 뻘짓을 하거나, 친구들(히미코, 프로듀서)에게 집중 공격을 당했을 때다. 터프한 선인도, 터프한 악인도 되지 못하고 도망 다니는 버드의 내리막길 멘탈은 처절하고 비열하고 지질했다. 인간이 자기혐오에 빠져 스스로를 망가트리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것을,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렇게 멋지게 썼다.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짓을 저지르고 싶었다. 지나간 칠 년을 단번에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것은 현기증이었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극복할 수 없는 추락 욕구.
현기증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허약함에 도취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허약함을 의식하고 그에 저항하기보다는 투항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허약함에 취해 더욱 허약해지고 싶어 하며,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주 대로에 쓰러지고, 땅바닥에, 땅바닥보다 더 낮게 가라앉고 싶은 것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거장들은 인간이 가진 추악한 부분을 까고 또 까고 난도질하는 데 주저함이 없고, 나는 늘 그런 문장에 매료되고 만다. 그 신랄함 속에서 나까지 벌거벗겨지는 기분이 든다.

버드는 결국 아들을 수술시키고 불확실한 미래를 책임지기로 한다. 아이를 뒷골목 의사에게 데려가는 차 안에서 히미코는 장황하게, 둘의 관계가 로드 무비의 로맨스처럼 불타고 있으며 그 케미가 정점을 찍었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버드의 머릿속에는 아들이 비를 맞게 될 걱정뿐이다. 그것이 부성애가 만들어낸 걱정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인생에 돌연 등장한 커다란 문제 앞에서, 그는 결코 도망가는 선택만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버드가 터프한 선인이 되기를 선택하면서 자신에게 던진 질문은 무겁고, 모든 상황을 무섭도록 단순화시킨다. 질문 자체가 단순해서가 아니다. 그 질문 앞에서 하는 말들이 대부분 핑계와 변명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아기 괴물에게서 수치스러운 짓들을 무수히 거듭하여 도망치면서 도대체 무엇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 대체 어떤 나 자신을 지켜내겠다고 시도한 것일까? 하고 버드는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기가 막혔다. 답은 제로였다.
— 오에 겐자부로, 『개인적인 체험』

작가는 이 소설이 열린 결말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난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해가 간다. 정해진 결말은 소설을 교훈적으로 만들고, 사람들은 열린 결말에 자신의 지분이 있다고 느끼니까. 그에 대한 작가 자신의 이야기는 이렇다.

원래부터 나에게는 아들의 운명이 호전되기를 바라는 기원이 있었고, 그것이 작용하여 쓰고 있던 소설의 종막을 밝은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야기되는 아이의 앞날이 반드시 낙천적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내가 두 개의 애스터리스크 뒷부분의 장면을 고집했던 것은, 젊은 작가다운 방법상의 이유 혹은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였다. 나는 젊은이들과 버드 사이의 두 번의 만남을 통해 경험에 의한 버드의 변화와 성장을 표현한다는 처음의 구상을 지키고 싶었다.
지금 이미 중년의 절반을 지나 나름의 경험을 쌓아온 작가로서 이 소설을 다시 보면, “만약 내가 지금 아기를 구해 내기 전에 사고로 죽는다면 지금까지 27년의 내 삶은 말짱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다고 버드는 생각했다. 일찍이 맛본 적이 없는 끔찍한 공포감이 버드를 사로잡았다”라는 한 구절이 충분한 힘과 무게를 지닐 수 있도록 선행되는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면, 여기서 소설을 끝낸다 해도 자신이 꾀하던 바는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후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는 독자에게 온전히 맡겨 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 소설을 쓴 내가 두 개의 애스터리스크에 이어지는 장면을 여전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것에 관해서는, 나름대로 젊은 작가로서의 필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바로 그 때문에 비판을 각오하고 구상을 관철시켰던 것이라고 지금도 나는 그런 나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
— 오에 겐자부로, 1981년 1월

작가의 아들은 실제로 머리에 이상을 가진 신생아로 태어났다.

그리고 나 또한, 작가의 그 구상을 지지한다.

느닷없이 버드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폴리네르처럼 머리에 붕대를 감고,라는 이미지가 버드의 감정을 단번에 단순화하여 방향을 지워준 것이다. 버드는 센티멘털로 질척 질척해진 자신이 허용되고 정당화되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눈물에서 단맛조차 발견했다. 내 아들은 아폴리네르처럼 머리에 붕대를 감고 찾아왔다. 내가 모르는 어둡고 고독한 전장에서 부상당하여. 나는 아들을 전사자처럼 매장해야만 한다. 버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버드는 뒤가 켕기는 듯한 안도감과 바닥 깊은 공포감을 함께 맛보았다. 나는 언젠가 그 아기를 잊어버리게 되겠지. 무한한 암흑으로부터 나타나 10개월의 배아 상태를 보내고, 그리고 몇 시간의 견디기 힘든 불쾌감을 맛보고 나서 또다시 결정적인 무한의 암흑 속으로 하강해 가는 존재. 나는 그에 관해 금세 잊어버리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내 자신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 그것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때, 나의 죽음의 고통과 공포가 배가된다면 나는 그나마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다하게 되는 것이다.

버드는 걸었다. 초여름 오전의 가장 상쾌한 시간, 소학교 소풍 때의 추억 냄새가 나는 미풍이 버드의 수면 부족으로 화끈대는 뺨과 귓불에 꿈틀꿈틀 떨리는 쾌감의 벌레를 기어 다니게 만들었다. 그의 피부 감각과 신경 세포는 의식의 제어로부터 멀면 멀수록 확실하게 이 계절, 이 시간의 근사함과 생생한 해방감을 맛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침내 의식의 표면에까지 넓어져 왔다.

버드는 자신이 미소 짓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것이다. 버드는 몸서리치며 미소를 떨쳐냈고 자기 아기의 불행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버드는 미소 지은 자신에게서 죄의 증거를 발견했던 것이다.

한 인간이 요절하면서 뒤에 남겨 두는 우주와 그가 죽음을 면해 살아가고 있는 우주라는 형태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끊임없이 증식해 가는 거야. 내가 다원적 우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의미지.

그는 타임머신을 타고 1만 년 전의 세계를 찾아온 여행자라도 된 것처럼 자신의 영향으로 현실 세계에 조금이라도 이변을 일으킬까 봐 몹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기의 이상에 관해 알게 되고부터 그의 내면에 점차 커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버드는 나쁜 패가 계속되는 카드놀이에서 잠시 빠지듯이 얼마 동안 이 세계에서 내리고 싶은 것이다.

버드는 지금 자신이 비열함으로 가는 내리막길의 첫걸음을 내디뎠다는 것을, 비열함이라는 눈덩이가 최초의 일 회전을 행했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는 쏜살같이 비열함의 언덕을 내리구를 것이고 그의 비열함이라는 눈덩이는 순식간에 불어날 것이 분명하다. 그 절대적인 불가피성의 예감에 버드는 다시 한번 몸서리쳤다.

“그렇지. 지금 나는 마조히즘에 관해 생각하고 있던 참이거든.“하고 떠보듯이 버드는 말했다. 비열하게도 그는 히미코가 마조히즘이라는 낱말의 가짜 미끼를 덥석 물며, 나는 자주 새디즘에 관해 생각하곤 해, 하는 식의 탐욕스런 소리를, 마찬가지 비열한 탐색의 손을 뻗치며 대답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버드에겐 성도착 지원자의 필사적인 정직함조차 결여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그는 수치심이라는 감각의 독이 불러온 퇴폐의 극에 있었다.

“그렇지, 버드. 넌 이번 일이 시작되고부터 아직 아무에게서도 위로를 받지 못했었잖아? 그건 좋지 않아, 버드. 이럴 때, 한 번쯤 과도할 만큼 위로를 받아두지 않으면 용맹심을 발휘해서 혼돈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할 때, 텅 빈 껍데기만 남아 있게 되거든.”

“개인적인 체험 중에도 혼자서 그 체험의 동굴을 자꾸 나아가다 보면, 마침내 인간 일반에 관련된 진실의 전망이 열리는 샛길로 나올 수 있는 그런 체험이 있지? 그런 경우, 어쨌든 고통스런 개인에게는 고통 뒤의 열매가 주어지는 것이고. 흑암의 동굴에서 괴로운 경험을 했지만 땅 위로 나올 수가 있음과 동시에 금화 주머니를 손에 넣었던 톰 소여처럼! 그런데 지금 내가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고역이란 놈은 다른 어떤 인간 세계로부터도 고립되어 있는 자기 혼자만의 수혈을 절망적으로 깊숙이 파 들어가는 것에 불과해. 같은 암흑 속 동굴에서 고통스레 땀을 흘리지만 나의 체험으로부터는 인간적인 의미의 단 한 조각도 만들어지지 않지. 불모의, 수치스러울 따름인 지긋지긋한 웅덩이 파기야. 나의 톰 소여는 끝없이 깊은 수혈 밑바닥에서 미쳐 버릴지도 몰라.”

버드는 히미코가 지금 보였던 반발에 충격을 받았다. 버드는 히미코의 집을 찾아온 이후 언제나 자기 본위로 행동했고 자기 스스로에게만 집착하여, 히미코를 자신의 의식 세계의 세포 하나 정도로밖에 느끼지 않았던 듯하다. 나는 어째서 이유도 없이 그런 식의 절대적인 권리를 확신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개인적인 불행의 번데기가 되어 불행의 고치 안쪽의 일 밖에는 안중에 없었고 번데기로서의 특권을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자넨 이번 불행과 정면에서 맞서 잘 싸웠군 그래.“하고 교수가 말했다. “아뇨, 저는 여러 번 도망치려 했었어요, 거의 도망쳐 버릴 뻔했었죠”하고 버드는 말했다. 그러고는 자기도 모르게 원망스러움을 억누르는듯한 음성이 되어 “하지만 이 현실의 삶을 살아 낸다고 하는 것은 결국 정통적으로 살도록 강요당하는 것인 모양이네요. 기만의 올무에 걸려 버릴 작정을 하고 있는데도 어느샌가 그것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그런 식으로요.” “그렇게 하지 않고 현실의 삶을 살 수도 있다네, 버드. 기만에서 기만으로 개구리 뜀 뛰듯이 죽을 때까지 가는 인간도 있지.“하고 교수는 말했다.

Recommended Re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