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숲속의 현자가 전하는 마지막 인생 수업 -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Jag kan ha fel och andra visdomar fran mitt liv som buddhistmunk (2020)
Notes
대기업 임원으로 승승장구하던 저자는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태국으로 떠나 숲속의 승려가 된다. 금발머리 승려에서 다시 속세로 돌아와 멘토가 된 저자는, 루게릭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삶에 대해 마지막으로 남긴 에세이를 썼다.
요즘 갖가지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는데, 마침 그런 상황에 도움이 될 만한 문장들을 만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다소 뻔한 부처의 가르침이지만, 이 책을 통해 다시 마주하니 새삼 명상을 다시 시작해보고 싶어졌다. 생각해보면, 내 생각 속에 지나치게 파고들고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리는 일이야말로 나를 갉아먹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7년 동안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에 매진한 결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다 믿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게 제가 얻은 초능력입니다.
아무도 중간에 방해하거나 의견을 내거나 분석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소박한 진심을 털어놓으면 나머지 이들은 열린 마음으로 묵묵히 들었습니다.
서구에서는, 특히 사업 영역에선 지적 능력이 사실상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선 제가 오랫동안 의심해왔던 가설 하나를 설득력 있게 증명해주었습니다. 즉, 인간의 가치와 재주는 높은 지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지요., 우리 머릿속에 한계가 없는 지성이 존재하며, 우리는 거기 더 깊이 의지할수록 더욱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제 안에 있는 현명한 목소리, 저를 이곳까지 오게 한 목소리는 새겨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난생처음으로 세상과 제 생각이 일치했습니다. 인생에서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었지요. 현재 하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기. 진실을 말하기. 서로 돕기. 쉼 없이 떠오르는 생각보다 침묵을 신뢰하기. 이러한 가치들이 마침내 집에 돌아온 것 같습니다.
자네들 그거 아는가? 우리 정신은 어떤 면에서 이 칼과 흡사하다네. 내가 이 칼을 아무 때나 사용하면 어떻게 되겠나? 플라스틱도 자르고 콘크리트도 자르고 유리, 금속, 나무, 돌까지 마구 자른다고 상상해보게. 날이 금세 무뎌져서 제 역할을 할 수 없겠지. 반면에 나무를 자를 때 외엔 칼집에 꽂아두고 쉬게 하면, 이 칼은 제 역할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겠지. 그것도 아주 오래오래.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정교하게 연마된 자기만의 조용한 나침반이 있어요. 그러나 그 지혜는 요란스러운 자아와 달리 은은해서 일부러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자아가 던지는 질문과 요구는 그보다 몇 배나 시끄러워 지혜의 소리를 완전히 묻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따금 주파수를 바꾸는 것은 그래서 더 중요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틈을 내어 멈추고 고요를 느끼는 겁니다. 정적의 순간을 찾는 것이지요. 어떤 삶을 살든 자기 안의 평화를 발견하려면 우리에게 내재한 소중한 능력을 돌보고 키워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못할 때 우리의 관심은 언제 어디서나 가장 요란한 소리에 쏠릴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삶이 막장 드라마가 되어버립니다. 갈등에 끌리고, 불안과 불행에 가장 기민하게 반응하고 집중하게 됩니다. 항시 현실과 투쟁하게 되지요.
단지 남들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판단한다는 이유로 진심으로 바뀐 사람이 인류 역사를 통틀어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는데도 우리는 계속해서 남들을 판단하고 우리 뜻대로 바꾸려 합니다. 거의 떼쓰는 어린아이 같은 집요함으로 그 방식을 고집하지요. 마치 세상이 자기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굳건하게 믿는 것처럼 말입니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좌절하거나 폭발하고 우울해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대단하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가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만 매달리는 토끼 같은 사람과 대화할 때면 별로 즐겁지 않습니다. 그런 이들은 바로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제 말에 좀체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아요. 마치 제 말이 끝나자마자 뭐라고 대답할지 궁리하느라 바빠 정작 내용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 제가 무슨 이야기를 했든 보고서라도 되는 듯 계속해서 평가하고 검토하고는 그들의 세계관에 들어맞는 생각이나 관점만을 인정해주지요. 그런 관계에서는 전혀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달리 말해서 그런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따분하기 그지없지요.
통제 욕구를 내려놓고 당면한 상황을 의식하려면 불확실성에 직면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상당히 벅찬 일입니다. 인간은 본래 무엇이든 알고 싶어 합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충동이지요. 앞날을 알 수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불안을 느끼면서 행동 또한 경직됩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엄청난 불확실성 속에 살아가면서도 상황을 예측할 수 있는 척합니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에 대한 계획과 예상에 집착하고 필사적으로 그렇게 되기를 고대하지요. 물론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 삶을 미리 계획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계획을 세우는 것과 그 계획이 반드시 결실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영적 성장의 결정적인 도약은 불확실성에 직면할 용기를 내는 데서 이뤄집니다. 우리의 무지를 편견으로 가리지 않을 때, 우리 마음대로 앞일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을 참아낼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가장 현명해집니다. 삶을 뜻대로 휘두르려고 노력하는 건 끊임없이 흐르는 물살을 맨손으로 붙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끊임없는 변화를 자연의 속성입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헛된 노력을 덜 기울이며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믿음과 미래에 덜 집착하고, 삶이 실제로 벌어지는 유일한 장소인 지금 여기에 더 마음을 여는 과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