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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 - 테렌스 데 프레

The Survivor: An Anatomy of Life in Death Camps

생존자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 표지|150

Notes

미국 영문학자인 저자는 나치와 소련 등 강제 수용소 생존자들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 생명의 존엄을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생존은 문명사회가 기대하는 상징적, 영웅주의적 방식의 생존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 즉 ‘생명’ 그 자체로서의 실존적 생존이다.

형이상학적으로 추구되는 ’인간다움’과 ’보다 높은 가치’는, 급기야 우리 스스로 ’죽음’을 부정하게 만들고 그저 살아내고자 하는 생물학적 욕구를 경시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존엄은 이런 추상화된 ’인간다움’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이전, 영장류가 ’의식’을 갖고 다른 동물과 다르게 진화해 온 바로 그 원초적 과정 안에 있다. 형이상학이 의식을 관념으로 밀어붙여 죽음마저 부정하게 만들었다면, 저자는 그 의식을 다시 생명 자체로 끌어내린 것이다. 그저 살아내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뒤덮은 지옥에서 비로소 깨어나는, ’삶’을 향한 명징한 욕구.

이 ’의식’이야말로 인간만이 선택을 할 수 있는 이유다. 그런데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선을 저버릴 자유도 함께 지녔다는 뜻이다. 그 자유 때문에 인간은 마크 롤랜즈가 『철학자와 늑대』에서 서술했듯 ’속임수와 거짓으로 진화된 영장류’로서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반대로 본성에 어긋난 행동을 할 만큼 자유롭지 못한 동물들은 정교하게 계산된 악을 행사할 수 없다. 선택할 자유가 없기에, 동물에게는 존엄성을 지키려는 의지와 본능을 스스로 획득해 ’독보적인 존재’가 될 기회도, 선택도 주어지지 않는다.

결국 홀로코스트와, 인간적 맥락에서의 존엄성은 같은 자유에서 갈라져 나온 두 갈래다. 의식을 가졌기에 저지를 수 있었던 잔혹함과, 의식을 가졌기에 지켜낼 수 있었던 존엄이 결국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셈이다. 실제로 테렌스 데 프레는 대량학살이라는 참극 속에서, ’의식’을 가진 인간의 특수성으로부터 인간다움을 향한 존엄의 추구와 생명 본연의 목적을 발견했다. 반면 마크 롤랜즈는 늑대 브레닌을 통해, 그런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운 야생의 생명체가 살아가는 ’현재’의 가치를 발견했다.

생물학적 지혜란 엄연히 존재하며, 이것은 우리에게 생명 자체의 욕구 속에 정신이 깃들게 된다는 것을 알린다. 옛날처럼 고귀하거나 신이 부여해준 것도 아니고 특별히 드라마틱하거나 숭고한 것도 아니며, 다만 노동과 타인과 교류하며 평범한 행복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 그리고 육신을 가진 동물의 운명이기도 한 작은 육체적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생물학적 지혜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태어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 과정 자체에도 ’보다 높은 이념’에 대한 우리들의 갈망을 잠재울 만한 충분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의미란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노동, 슬픔, 작은 성취들 가운데서 끝없이 새롭게 나타나는 아주 구체적인 의미를 말한다. 태양은 바로 여기 있다. 생존자들과 사형수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 대지는 고요 속에 잠겨 있고, 생명은 전부 다 거기에 있다. 헤겔이 말했던 ’영혼의 세속화’가 집단 강제 수용소에서 최초로 실현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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