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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늑대 - 마크 롤랜즈

The Philosopher and the Wolf: Lessons from the wild on love, death and happiness(2008)

철학자와 늑대 표지|150

Notes

The Phillosopher and the Wolf : Lessons from the wild on love, death and happiness

철학자인 저자가 11년 동안 늑대 ’브레닌’과 동거하며 경험한 일들을 통해 사랑, 죽음, 행복에 관한 철학적 사유를 담은 에세이. 자연과 야생에 대한 자연주의적 고찰일 줄 알았으나 영장류인 인간의 삶을 철저히 비판, 비관하는 뼈 아픈 철학서였다. 특히 죽음과 행복을 시간과 관련해 사유한 부분이 압권.

  • 인류의 과학적・예술적 지능은 속임수와 계락의 피해자가 되기보다는 가해자가 되고자 하는 진화의 부산물이다.

  • 진정한 인간의 선은 아무런 힘이 없는 자들을 대할 때. 순수와 자유로움 그 자체로 나타난다. 가장 극단적이고 너무나 심오하여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진정한 인간성의 도덕적 시험은 힘없는 동물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너무나 근본적이어서 다른 모든 이들이 무감하게 따라하게 되는 인간의 근본적인 직무유기가 여기에 존재한다.

  • 오직 인간만이 자신이 약하다는 이유로 부족한 도덕성을 변명하고 있다는 명징한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인간은 더 이상 변명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그리고 신념을 지켜 낼 수도 없을 만큼 약해졌기 때문이다.

  • 나는 길게 펼쳐진 잔디밭에 앉아 브레닌이 토끼 뒤를 몰래 쫓는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삶 속에서 감정이 아니라 토끼를 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사람에서 가장 좋은 순간, 우리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은 즐거운 동시에 몹시 즐겁지 않다. 행복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 테르툴리아누스의 천국에는 증오심에 찬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내 지옥은 사랑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인간과 늑대 사이에서>

인간을 한 문장으로 정의 내린다면, 자신이 규정한 모습을 믿는 동물이다. 인간처럼 잘 믿는 동물도 없다.

결국 영장류의 계략은 헛된 것이 될 터이므로, 제 꾀에 제가 넘어가서 영장류의 운도 다할 것이다. 그 후에야 비로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의 계략과 영민함과 운이 충만할 때가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다했을 때 남은, 혹은 버려진 우리 자신을 말이다.

<때로는 동생처럼, 때로는 형처럼>

대인 논증은 그 자체가 아니라 논증을 제시하는 사람에 대한 논증으로서, 논증 오류로 규정한다.

‘어떻게 자연 속에 살던 야생동물을 데려다가 전혀 자연스럽지 못한 생활을 하도록 강요할 수 있느냐?’ 이 질문의 바탕에는 모름지기 늑대라면 무리와 함께 어울리고 사냥을 하면서 자연의 의도대로 살아야만 진정 행복하고 완전하다는 믿음이 깔려있는 것 같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처럼 보이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먼저 자연의 의도부터 정의해보자. 늑대에게 있어 자연의 의도는 무엇인가? 혹은 인간에게 있어 자연의 의도는 또 무엇인가? 자연이 어떤 의미에서 ’의도’라는 것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진화론에서 볼 때 우리는 가끔 자연의 의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의인화하는데, 그러한 담론은 결국 자연은 피조물이 자손을 번식시키도록 의도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자연의 의도라는 주장에 대해 유일하게 구체적인 의미는 유전적 성공이라는 개념이다. 사냥을 하고 집단 생활을 하는 것은 늑대 같은 동물이 생물학적 기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채택한 전략이다. 그러나 모든 늑대가 다 똑같은 전략을 채택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역사를 보면 늑대가 인간 집단에 애착을 느껴 개가 된 시점이 있다. 즉, 이것도 늑대가 늑대로 계속 남아있는 것 만큼이나 자연의 의도인 것이다.

누군가 늑대는 집단 생활과 사냥같은 자연적 행동을 할 때만 행복하다고 주장한다면 먼저 그 전제부터 본다. 그 속에는 대부분 인간의 거만함이 표현되어 있을 것이다.

왜 오로지 인간만이 수천가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고, 다른 생명은 생물학적 유산에 속박되고 자연의 역사에 종속되어 살아야만 한다는 말인가?

브레닌이 야생의 늑대가 하는 일을 하지 못해 행복하지 않다고 단정 짓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고, 그의 지능과 유연성을 폄하하는 것이다.

개나 늑대의 본질이 실존에 앞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내게는 개나 늑대는 인간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제 존재를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 때문에 어떤 개나 늑대도 존중을 받아야 하고 그에 따라 권리, 특히 도덕적 권리도 부여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쾰러가 말한 ’행동의 결과에 대한 권리’이다. 늑대는 생물학적 유산에 따라 살아야 하는 꼭두각시 인형이 아니다. 최소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렇다.

어떤 이들은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이 동물을 소유하는 것이므로 옳지않다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최소한 법률적 의미에서 나는 브레닌의 ’소유자’였다. 소유를 증명하는 서류 같은 건 없으므로 법정에서 이를 증명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위의 주장은 그 자체로서 불합리하기 때문에 진지하게 곱씹어 본 적이 없다. 그 주장은 동물의 법적 주인은 오직 동물을 소유하고 지배할 뿐, 다른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이를 믿을 만한 근거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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