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존 윌리엄스 장편소설 - 존 윌리엄스
Stoner (1965)
Notes
그대 내게서 계절을 보리.
추위에 떠는 나뭇가지에
노란 이파리들이 몇 잎 또는 하나도 없는 계절
얼마 전 예쁜 새들이 노래했으나 살풍경한 폐허가 된 성가대석을
내게서 그대 그날의 황혼을 보리.
석양이 서쪽에서 희미해졌을 때처럼
머지않아 암흑의 밤이 가져갈 황혼
모든 것을 안식에 봉인하는 죽음의 두 번째 자아
그 암흑의 밤이 닥쳐올 황혼을.
내게서 그대 그렇게 타는 불꽃의 빛을 보리.
양분이 되었던 것과 함께 소진되어
반드시 목숨을 다해야 할 죽음의 침상처럼
젊음이 타고 남은 재 위에 놓인 불꽃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이어진 침묵의 순간에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슬론은 이 시를 다시 읊었다.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가 평소처럼 단조롭게 변했다.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 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슬론의 시간이 윌리엄 스토에게 되돌아왔다.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 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이 한참 동안 숨을 멈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부드럽게 숨을 내쉬면서 허파에서 숨이 빠져나갈 때마다 옷이 움직이는 것을 세심하게 인식했다. 그는 슬론에게서 시선을 떼어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온 햇빛이 동료 학생들의 얼굴에 안착해서, 마치 그들의 안에서 나온 빛이 어둠에 맞서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 학생이 눈을 깜박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 스토너는 책상을 꽉 붙들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그 갈색 피부에 감탄하고, 뭉툭한 손끝에 꼭 맞게 손톱을 만들어준 그 복잡한 메커니즘에 감탄했다. 작고 작은 정맥과 동맥 속에서 섬세하게 박동하며 손끝에서 온몸으로 불안하게 흐르는 피가 느껴지는 듯했다.
나중에, 훨씬 더 나이를 먹은 뒤에 그는 학부의 마지막 두 해를 뒤돌아보며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을 돌아보듯 까마득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의 시간은 익숙하게 흐르지 않고 발작처럼 뚝뚝 끊겨 있었다. 순간과 순간이 나란히 놓인 것 같으면서도 서로 소외되어 있어서, 그는 자신이 시간과 동떨어진 곳에서 고르지 못한 속도로 돌아가는 커다란 디오라마를 보듯이 시간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네도 세상에 나가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있는 머리는 있지. 딱 그만큼만. 자네는 처음부터 실패자로 만들어졌꼬, 자네도 그걸 알고 있어. 비록 개자식처럼 굴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항상 그렇게 굴 수 있을 만큼 막돼먹지는 않았거든. 딱히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자네가 가장 정직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자네가 영웅적인 수준으로 부정직한 것도 아냐. 일할 능력은 있으나 게을러서 세상이 원하는 만큼 근면하게 일하지는 못하지. 하지만 자신의 중요성을 세상에 각인할 수 있을 만큼 게으르지도 않아. 게다가 운도 없고. 음, 그런 편이지. 특별한 기세를 내뿜지도 않고, 항상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어. 세상에 나가면 항상 성공의 언저리에서기는 하겠지만, 자신의 잘못으로 파멸할 걸세.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선택된 사람이지. 신의 유머감각은 항상 재미있어. 신의 섭리가 자네를 세상의 턱 앞에서 낚아채 여기에 안전히 놓아준 거야. 자네 형제들 속에.”
여전히 미소 짓는 얼굴로 비꼬듯 악의적인 표정을 지으면서 그가 스토너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도 도망칠 길은 없어, 친구. 없고말고. 자네가 누군가? 소박한 땅의 아들? 자네가 행세하는 것처럼? 아니, 아니지. 자네도 환자일세. 자네는 몽상가이고 광인이야. 세상은 더 미쳤지만. 산초가 없는 우리만의 돈키호테. 푸른 하늘 밑에서 뛰놀고 있지. 자네는 꽤 똑똑해. 어쨌든 우리 둘의 친구인 저 녀석보다는 똑똑하니까. 하지만 자네에게는 오점이 있네. 오래된 약점. 자네는 여기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지. 여기서 뭔가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하지만 세상에 나가면 곧 알 수 있을 걸세. 자네 역시 처음부터 실패자로 만들어졌다는 걸. 자네가 세상과 싸울 거라는 애기가 아냐. 세상이 자네를 잘근잘근 씹어서 뱉어내도 자네는 아무것도 못할 걸세. 그냥 멍하니 누워 무엇이 잘못된 건지 생각하겠지. 자네는 항상 세상에게서 실제로는 있지 않은 것, 세상이 원한 적 없는 것을 기대하니까. 목화밭의 바구미, 콩줄기 속의 벌레, 옥수수 속의 좀벌레. 자네는 그런 것들을 마주보지도 못하고, 싸우지도 못해. 너무 약하면서 동시에 너무 강하니까. 이 세상에 자네가 갈 수 있는 자리는 없네.”
“그럼 자네는?” 핀치가 물었따. “자네는 어때?”
“아.” 매스터스가 뒤로 물러나 등을 기대며 말했다. “나도 자네들과 같지. 아니, 사실 더 심해. 너무 똑똑해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거든. 게다가 그 사실을 잠자코 숨기지도 않을테고. 이건 불치병일세. 그러니 무책임한 짓을 해도 안전한 곳, 내가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는 곳에 날 가둬두어야 해.” 그가 다시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두 사람을 향해 빙긋 웃었다. “우린 모두 가엾은 톰이고, 차갑게 식었어.”
전에는 죽음을 문학적 사건 또는 불완전한 육체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조용하게 마모되어 가는 과정으로만 생각했다.
젊은 시절의 어색함과 서투름은 아직 남아 있는 반면, 어쩌면 우정을 쌓는 데 도움이 되었을 솔직함과 열정은 사라져버린 탓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망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그를 슬프게 했다.
문학, 언어, 정밀하고 기묘하며 뜻밖의 조합을 이룬 글 속에서 그 무엇보다 검고 그 무엇보다 차가운 글자를 통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과 정신의 신비, 이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그는 마치 위험하고 부정한 것을 숨기듯 숨겨왔지만, 이제는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다가 대담하게, 종내는 자랑스럽게.
이제 나이를 먹은 그는 압도적일 정도로 단순해서 대처할 수단이 전혀 없는 문제가 점점 강렬해지는 순간에 도달했다. 자신의 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그의 생각에는 그런 것 같았다). 문제의 의문이 지금 자신이 직면한 가장 뻔한 원인, 즉 자신의 삶에서 튀어나온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극 생각하기에는 나이를 먹은 탓에, 그가 우연히 겪은 일들과 주변 상황이 강렬한 탓에, 자신이 그 일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탓에 그런 의문이 생겨난 것 같았다. 그는 보잘것없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것들 덕분에 이런 지식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우울하고 역설적인 기쁨을 느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극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얼마 전부터 떠날 계획을 미리 짜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스토너는 그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그것을 미리 알지 못했다는 것에, 그리고 그녀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담은 마지막 편지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했다.
비록 스토너는 그들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의식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 심연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항상 단단하고 황량한 표정을 짓게 되었던 그 10년 동안, 그런 표정을 공기만큼 친숙하게 알고 있던 윌리엄 스토너는 어렸을 때부터 겪은 전반적인 절망의 징조를 보았다. 좋은 사람들이 번듯한 생활에 대한 꿈이 깨어지면서 함께 망가져서 서서히 절망을 향해 스러져가는 것이 보였다.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도는 그들의 눈은 깨진 유리조각처럼 공허했다. 그들은 스스로 처형장을 향해 가는 사람처럼 고통스러운 자존심을 품고 남의 집 뒷문으로 다가와 빵을 구걸했다. 그것을 먹으면 다시 구걸에 나설 기운을 얻을 수 있을 터이니. 한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자신 있게 걷던 이들이 이제는 부러움과 증오가 깃든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대학의 종신교수로서 누리고 있는 보잘것없는 안정감이 어떻게든 사라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인식한 이런 일들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들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움직여 깊숙이 숨겨져 있어서 남들은 보지 못하는 부분에서 그를 변화시켰다. 모두가 함께 겪고 있는 곤궁한 생활에 대한 조용한 슬픔이 그가 살아가는 매 순간 한 번도 깊숙이 파묻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윌리엄 스토너는 젊은 동료들이 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 기억 밑에 고생과 굶주림과 인내와 고통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그가 분빌에서 농사를 지으며 보낸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무명의 존재로서 근면하고 금욕적으로 살다 간 선조들에게서 혈연을 통해 물려받은 것에 대한 지식이 항상 의식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선조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을 보여주자는 공통의 기준을 갖고 있었다.
아이가 워낙 섬세한 도덕적 본성을 타고났기 때문에 계속 그 본성을 보살피고 키워주어야 하는 드물고 사랑스러운 인간에 속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주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따. 그런데 이처럼 세상과 이질적인 본성이 도저히 집이라고 할 수 없는 곳에서 살아야 했다. 부드러운 애정과 조용한 생활을 갈망하는 본성이 무관심과 무정함과 소음을 먹고 자라야 했다. 그런데 그 본성은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그 이상하고 유해한 환경 속에서도 사나움을 얻지 못해서 자신에게 맞서는 잔혹한 세력과 싸워 물리치지 못하고 그저 조용한 곳으로 물러나 작게 웅크린 채 고독하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그 상실감, 그가 너무나 오랫동안 속에 담아두었던 그 상실감이 쏟아져 나와 그를 집어삼켰다. 그는 의지를 넘어 그 흐름에 휩쓸리는 자신을 내버려 두었다. 자신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기억을 향해 미소 짓는 것처럼. 이제 자신은 예순 살이 다 되었으므로 그런 열정이나 사랑의 힘을 초월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느낀 연민과 슬픔은 너무 오래돼서 그의 나이의 일부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세상사가 자신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노인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가끔 아침에 면도를 하다가 거울을 보면 그 속에서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마주 바라보는 얼굴에 결코 동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 기괴한 가면 속에서 눈빛만 선명했다. 마치 자신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터무니없는 변장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하얗게 세어버린 그 텁수룩한 눈썹, 헝클어진 백발, 앙상한 뼈 주위로 늘어진 살, 나이 든 척 하는 깊은 주름살들을 모두 벗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홀리, 이미 오랫동안 자네와 알고 지낸 만큼 자네가 나를 나름대로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네. 나는 자네가 내게 ‘줄’ 수 있는 것이나 내게 ‘할’ 수 있는 행동에 대해 조금도 신경을 써본 적이 없어. 전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따. 정말이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피곤했다. 그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닐세. 그건 한 번도 중요했던 적이 없어. 난 자네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물론, 좋은 교수이기도 하고. 하지만 어떤 면에서 자네는 무식한 개자식일세.” 그는 또 잠시 말을 멈췄다. “자네가 바란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퇴직하지 않을 걸세. 이번 학년 말에도, 다음 학년 말에도.” 그는 천천히 일어나서 잠시 선 채로 힘을 모았다. “실례지만 내가 좀 피곤하네. 나는 이만 가볼 테니, 남은 이야기가 있으면 둘이서 마저 하게.”
두 사람 사이에 새삼 고요한 분위기가 자리를 잡았다. 그 조용한 분위기는 사랑이 시작될 때와 비슷했다. 스토너는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도 왜 이런 분위기가 생겨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입힌 상처를 용서하고, 자신들의 삶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지 생각하는 일에 빠져 있었다.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지만 한 명은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무의미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한 명은 이제 저 멀리 산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나서……. 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캐서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캐서린.”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거의 평생 동안 무심한 교사였음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눈을 뜨니 사방이 어두웠다. 그는 창밖의 하늘을 보았다. 진한 검푸른 색 공간. 구름 속에서 가느다란 달빛이 보였다. 아주 늦은 시간인 것 같았다. 밝은 오후의 햇빛 속에서 고든과 이디스가 옆에 서 있던 것이 조금 전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나? 그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몸과 함께 머리도 틀림없이 쇠약해졌다는 사실은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깨닫게 될 줄은 몰랐다. 몸은 강해.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해. 항상 계속 살아가려고 하지.
목소리가 들리고 불빛이 보이더니 통증이 오락가락했다. 이디스의 얼굴이 위에서 어른거렸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미소 짓는 것을 느꼈다. 가끔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침착하게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디스의 손이 그의 몸을 오가며 씻어주는 것이 느껴졌다. 이디스에게 다시 아이가 생겼군. 그는 생각했다. 이제야 저 사람이 돌봐줄 수 있는 아이가 생겼어. 그녀에게 말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생각했다.
뭔가 무거운 것이 그의 눈꺼풀을 누르고 있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그가 힘들게 눈을 떴다. 그가 느낀 것은 빛이었다. 오후의 밝은 햇빛. 그는 눈을 깜박이며 창문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눈부신 태양 가장자리를 덤덤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들이 진짜라는 결론을 내렸다. 손을 움직여 보았더니 몸속에 묘한 힘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공기 중에서 흘러들어온 것 같았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통증이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기운이 더 많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살갗이 찌릿찌릿했다. 얼굴에 닿는 빛과 그림자의 섬세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침대 옆의 벽에 등을 기댄 채 반쯤 앉은 자세를 취했다. 이제 문 밖의 모습이 보였다.
긴 잠을 자고 일어나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늦봄 또는 초여름…… 풍경을 보니 아무래도 초여름이지 싶었다. 뒷마당의 커다란 느릅나무 이파리들이 풍요롭게 반짝였다. 그 느릅나무 그늘은 그도 전에 경험한 적이 있는 깊이와 서늘함을 담고 있었다. 공기가 진하게 느껴졌다. 풀과 이파리와 꽃의 향기로운 냄새에 묵직함이 잔뜩 섞여서 그 향기들을 허공에 묶어두고 있었다. 그는 다시 숨을 들이쉬었다. 깊숙이. 긁히는 것 같은 자신의 숨소리가 들리고, 여름의 달콤함이 허파 속에 쌓이는 것이 느껴졌다.
또한 그 들숨과 함께 자신의 안쪽 깊숙한 곳 어딘가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움직임은 뭔가를 멈추게 하고, 그의 머리를 움직일 수 없게 고정해 버렸다. 하지만 이내 그 느낌이 사라졌다. 그는 생각했다. 그래, 이런 느낌이구나.
이디스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그녀를 부르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죽음은 이기적이야. 그는 생각했다. 죽어가는 사람은 혼자만의 순간을 원하지. 아이들처럼.
그는 다시 숨을 쉬었지만, 그의 몸 안에서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차이가 느껴졌다. 자신이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지식 같은 것을. 세상 모든 시간이 자신의 것인 양 느긋해도 될 것 같았다.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리자 그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학생들 몇 명이 뒷마당 잔디밭을 가로질렀다. 어딘가로 서둘러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모두 세 쌍이었다. 여학생들은 팔다리가 길었으며, 가벼운 여름옷을 입은 모습이 우아했다. 남학생들은 즐겁고 경이로운 표정으로 여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잔디밭에 거의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걸었다. 그래서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았다. 그는 시야를 점점 벗어나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오랫동안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한 여름날 오후에 어딘가 멀리서 아무것도 모른 채 터뜨리는 웃음소리.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그의 의식 가장자리에 뭔가가 모이는 것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좀 더 생생해지려고 힘을 모으고 있었지만, 그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자신이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원한다면 그들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그의 것이었다.
주위가 부드러워지더니, 팔다리에 나른함이 조금씩 밀려들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감각이 갑작스레 강렬하게 그를 덮쳤다. 그 힘이 느껴졌다. 그는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자신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협탁 위에 오랫동안 손도 대지 않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는 잠시 손으로 책들을 만지작거렸다. 가늘어진 손가락, 관절의 섬세한 움직임이 놀라웠다. 그 안의 힘이 느껴져서 그는 탁자 위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책 더미에서 손가락으로 책 한 권을 뽑아냈다. 그가 찾고 있던 그 자신의 책이었다. 손에 그 책을 쥔 그는 오랫동안 색이 바래고 닳은 친숙한 빨간색 표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 책이 망각 속에 묻혔다는 사실,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 책의 가치에 대한 의문은 거의 하찮게 보였다. 흐릿하게 바랜 그 활자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될 것이라는 환상은 없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작은 일부가 정말로 그 안에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책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 책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장을 펄럭펄럭 넘기며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책장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짜릿한 느낌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그의 살과 뼈를 훑었다. 그는 그것을 어렴풋이 의식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그를 가둬주기를, 공포와 비슷한 그 옛날의 설렘이 그를 지금 이 자리에 고정해 주기를 기다렸다. 창밖을 지나가는 햇빛이 책장을 비췄기 때문에 그는 그곳에 쓰인 글자들을 볼 수 없었다.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몸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